1959년 6월 우장춘은 십이지장 궤양으로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였다. 약화된 병세에도 불구하고,그 때 한참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 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링거병을 거는 파이프에 묶어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1957년에 부산시에서는 부산시 문화상을 수여했고 정부에서는 그가 운명하기 얼마 전에 문화포장을 수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문화포장을 받는 자리에서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라고 말하고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 마침내 한많은 세월을 뒤로 하고 타계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잇달았다. 우장춘은 타계하였으나 그 동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침체해 있던 종묘계에 활기가 돌았다. 1960년대에는 많은 근대적인 육종 연구 농장이 개설되었고 현재는 50개에 이르고 있다.